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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함의 수용 77] 세자는 금천교 다리 위에서 밤새도록 대죄했다
2017년 09월 01일 (금) 00:01:04 이선구 okesk@naver.com
   
     

국청에서 쫓겨난 세자는 금천교 다리 위에서 밤새도록 대죄했다. 아버지를 하늘과 같이 알아야 하는 게 유교를 근간으로 개국한 조선왕국의 이념이었다.

하물며 국왕이니 오죽했겠는가. 세자는 대죄를 하는 동안 분통하고 억울하여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헤아려보니 이름도 생소한 남의 집 일개 청지기가 차기 왕권자王權者에게 비수를 겨눈 데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세자는 박필수 내관을 불러 명령했다.

“나경언의 배후를 캐보라. 이 억울함을 반드시 밝혀내겠노라.”

“하오나 저하, 나경언은 이미 이해중과 홍봉한 대감의 비호를 받으며 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까?”

“그자의 처자가 있을 것이니 잡아들이도록 해.”

아니나 다를까. 나경언의 처는 안성저란 사람이 사주했다고 고백했고, 안성저는 윤광유가 사주했다고 핑계를 댔다. 윤광유는 소론 우의정 윤동도의 아들이다. 그야말로 물귀신 작전에 다름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이 붙들려갔다는 소식에 윤동도가 영조에게 달려왔다.

“전하, 불미스런 일에 제 자식이 연루되어 제가 감히 사직하고자 청합니다.”

윤동도는 소론의 영수이며 윤증의 백부 윤순거의 증손자다.

세자는 즉시 나경언을 사주한 자는 노론 세력이며 소론과 자신을 이간시키려 음모를 꾸민 것이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드디어 동의금(의금부 종2품 관리) 이이장이 세자에게 귀띔을 한 다음 임금께 아뢰었다.

“전하, 죄인 나경언이 세자 저하를 모함했다고 자백했사옵니다. 일반 사람을 무고해도 역적이 되는데 하물며 세자를 무고한 죄야 더 말할 나위 있겠사옵니까? 흉악한 말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고 죄인이 자백을 했으니 극형으로 다스려야할 줄로 아뢰오.”

다른 대신들도 나경언을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청했지만 영조는 쉬 대답하지 않았다. 영조는 이미 이 사건을 세자를 제거하기 위한 기회로 삼기로 맘먹었다.

 

병지경의缾之罄矣 유뢰지치維罍之恥

작은 술병 비었으니 이는 오직 큰 술병의 수치.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하면 부모의 수치가 된다는 말을 영조는 또 다시 떠올렸다. 어차피 생김새와 행동, 그리고 뜻이 다른 부자父子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법. 영조의 마음이 삐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알지 못한 세자가 걸어서 대궐 문 밖으로 나가 부왕의 결정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새벽녘에 정휘량이 들어와 영조에게 아뢰었다.

“전하, 죄인이 이미 세자를 무함했다는 네 글자 ‘무함동궁誣陷東宮’을 자백했으니 그 죄를 단 하루라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임금은 다른 명령을 내렸다. 영조로선 자칫 폐세자의 기회가 사라질 위기였다.

“죄인을 사형에 처하라. 그리고 세자를 안으로 불러오라.”

세자가 들어와 뜰에 엎드려 옷이 다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혐의가 풀린 것으로 생각해 감정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임금은 이상하게도 배후자 색출을 명령하지 않았다. 다만 벌떡 일어나서 내전으로 가버렸다.

   
     

세자도 혐의가 풀린 것으로 생각하고 일어섰다. 세자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양제(조선시대 세자궁 궁녀직의 하나) 가선의 방이었다. 양제의 불 꺼진 어두운 침소 옆방에서 나인이 부스럭거리며 초롱불을 높이 쳐들었다. 그녀는 이내 세자를 발견하고 양제의 침소를 나직이 두드렸다.

“동궁마마 오셨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양제의 침소가 빠끔히 열렸다. 불은 꺼졌지만 내심 오래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마마, 어서 드시죠.”

세자가 들어가고 방문이 닫혔다.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습니까? 초롱을 밝힐까요?”

“그냥 두거라.”

소곤소곤 사이좋은 남녀가 나누는 목소리다.

“밤새 아바마마의 꾸지람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그녀가 세자를 껴안았다.

“아바마마의 지극하신 자애로움 덕분에 함정에서 벗어났다.”

아직껏 세자는 자신의 혐의가 벗겨졌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마마께서 무엇을 잘못하셨다는 것입니까?”

“그건 네가 잘못 알고 하는 말이다. 정말로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치 않다. 왕조국가에서는, 더구나 청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니 나를 죽이려고 환장을 한 노론 놈들이 조정과 궁궐 구석구석을 틀어잡고 있는 숨막히는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나인에게 들어 압니다. 대리청정을 결정한 날에도 동궁마마께옵선 병에서 회복도 채 안 된 상태에서 이마를 얼음 바닥에 찧어 벌겋게 피로 물들었고, 죄를 용서하시라며 머리와 등에 눈이 수북이 쌓이도록 엎드려 비셨다고요.”

부왕이 머릿속에서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세자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열다섯 살 때를 떠올렸다. 양위 소동에는 매번 반복되는 진행방식이 있었다. 전위를 선포하는 임금과, 눈물로서 이를 되돌리려는 세자와, 전위를 반대하는 신하의 절절한 주장들이 펼쳐지고 한동안 충돌이 있다가 대비께서 혜성처럼 나타나 가르마를 타는 형식이었다. 웃기게도 진심과는 거리가 먼 시늉을 예절이란 이름 아래 펼쳐 보이는 것이 조선시대의 통치철학 주자학이 낳은 행동규범이었다.

세자가 회상을 멈춘 것은 양제 가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마마, 이건 분명히 함정입니다.”

“너무 세속적인 일에 관심을 갖지 말거라. 넌 비구니가 아니었더냐?”

세자가 나직이 말했다.

“어머나. 저는 원래 중이 아니옵고 뼈대 있는 가문의 딸이란 걸 아시면서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그래도 날 만나게 하려는 하늘의 뜻이 있었으니 네가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 가 있었던 것이 아니더냐?”

하지만 가선의 목소리는 불만투성이였다.

“부처님의 뜻인지 야소(예수)의 뜻인지, 아니면 뇌성보화천존(도교의 신)의 뜻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마마께옵서 함정에 빠진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가선아, 김한구와 정순왕후 김씨, 홍계희, 윤급 등등의 노론들이 아바마마께 쑤시개질을 하며 제 아무리 날뛴다 해도 결코 진실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맞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참아내셔야 합니다. 한 번의 분노를 참으면 백 일 동안 근심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물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나는 책에서 읽었다. 남을 해치고자 하면 자신이 먼저 다치는 법. 남을 해치는 말이 도리어 자신을 해치는 말이 되고 피를 머금었다가 남에게 뿜으려면 먼저 자기 입부터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마마, 이젠 옥추경(소경들이 무엇을 이루고자 빌 때 읽는 축문)을 완전히 잊으셨습니까?”

“너를 만나기 전엔 그것을 읽고 귀신을 부려보고자 한 것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이젠 옥, 추, 두 글자를 두려워하지도 않을뿐더러 천둥소리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

“부처님의 공덕이 그만큼 크시다는 뜻이온지요?”

“그런 뜻도 있지. 하지만 요즘 새로이 보기 시작한 책들이 있잖니. 그 가운데 내가 너무 놀란 책이 있다. <성경직해>라고 선왕께서 보시던 책이야.”

“성경직해?”

가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잠잠해졌다.

“어서 편히 쉬거라. 세자빈 침소에 가봐야겠다. 내 안위가 궁금해서 여태껏 잠을 못 이루지 못하고 있을 거야.”

갑자기 가선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바뀌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 방 나인이 우연히 본 엄청난 일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더냐?”

“마마, 놀라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작년에 평양에 가신 동안 일어난 일인데, 김한구란 자가 빙애 박씨와 통정하는 걸 나인이 우연히 보았다면서 제게 전했습니다. 마마를 따라 한양 궁궐로 온 지 얼마 안 된 제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내 손으로 빙애를 징벌했으니 그것으로 되었지 않느냐? 김한구란 흉악한 놈은 지금 임금의 자릴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놈이 제 아들딸 연놈들, 숙의 문씨와 문성국이를 앞세워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해. 노론 놈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지랄발광을 하는데, 이럴 때 아바마마께서 붕어하시면 그놈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할까? 그래서 나도 미력하나마 군사를 준비해온 것이다. 무기를 장만하여 창덕궁 군사들에게 주어 나를 호위케 해야 노론 놈들의 역모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세자가 어둠 속에서 침을 튀겼다.

“마마, 그런데 왕후께서…….”

“무슨 말이냐? 어서 해보라.”

“정순왕후 마마께서…….”

“어서 말해보래두. 직선적이고 솔직한 내 성격을 안다면 어서 속히 말해라.”

“마마, 왕후께옵서 다른 남자와…….”

갑자기 가선의 목소리는 소곤거리듯 작아졌다.

“뭐라고? 허허,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냐?”

“마마, 상대를 모르겠답니다. 분명한 사실이옵고……. 읍!”

가선의 말이 거기서 막히고 말았다. 세자가 손으로 그녀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가 아들을 낳기만 한다면 사도세자와 세손(이산)을 폐위시키고 세자 자리를 꿰어 차는 일이야말로 노론에서 1순위로 생각하고 있던 수였다. 당시 소문으론 열다섯에 예순다섯 살 먹은 영조에게 시집 온 정순왕후가 3년 동안 아기를 가져보려 써보지 않은 비방은 없었다.

“그 말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

“마마, 목소리조차 변했사오니 옥체를 생각하여 이젠 좀 푹 쉬십시오.”

“가선아, 때가 되면 너를 풀어주겠다. 이 궁궐이 답답하지 않느냐? 너도 다시금 절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가선의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지고 세자가 일어나는 듯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살포시 열렸다.

세자가 세자빈 홍씨에게로 갔다. 홍씨가 새벽잠에서 후닥닥 깨어 일어나며 통명전 침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자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저, 저하, 얼마나 고, 고생하셨습니까?”

친정아버지 홍봉한과의 비밀서신을 통해 머지않아 세자가 폐위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날이 그 날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남편을 밤새 기다렸고 남편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홍씨는 긴장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렇지 않아도 세자의 육중한 체격이 초롱불빛에 더 큰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남편이 흡사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어둠에 드리워진 섬뜩함에 그녀는 헛기침을 해보았다.

크음, 큼.

주상께 터무니없이 닦달을 당한 날이면 세자는 행동도 거칠게 하고 숙빈 임씨나 빙애를 찾아가곤 했다. 세자빈으로서 남편이 부왕께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진저리처질 정도였다. 그녀가 보기엔 아무래도 남편에겐 격간도동膈間挑動인가 뭔가 하는 병이 있는 것만 같았다. 혹시나 만에 하나 대조(임금)께서 정신이 좀 이상할지 모른다. 어쨌거나 주로 밤중에 발작적으로 벌어지는 임금의 세자 호출과 꾸짖음에 이은 한바탕 소동으로 대궐이 발칵 뒤집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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