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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함의 수용 76] 억울함이 피눈물 되어 세자 얼굴에 흘러내렸다
2017년 08월 21일 (월) 21:48:42 이선구 okesk@naver.com
   
     

신하들이 종용하는 바람에 차를 연거푸 마신 영조는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 사이 금군이 형조에서 나경언을 압송해왔다.

좌의정, 영의정 홍봉한, 처외삼촌 이해중, 경기 감사 홍계희, 도승지, 금위대장, 의금부 관리들과 내시들이 보는 가운데 즉시 임금의 친국이 이루어졌다.

“사실을 낱낱이 고하라!”

영조가 고함치자 나경언이 옷 솔기에서 두루마리 편지를 꺼내들었다. 길이는 5치(약 15센티)가 넘고 둘레는 한 줌 정도였다.

“이 글을 전하께 올리고자 했으나 올릴 길이 없사와 우선 형조에 올렸습니다.”

금군 군사가 그자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어 임금께 드렸다.

영조는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신음 소릴 냈다.

“이런 변이 일어날까 진즉부터 염려했었다. 영의정도 한번 읽어보라.”

영의정 홍봉한이 고개를 숙이고 편지를 모두 읽어보았다. 그가 편지를 손에 쥔 채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전하 신을 먼저 죽여주시옵소서.”

좌의정 윤동도도 임금께 요청하여 읽어보았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오늘 조정에서 사모를 쓰고 띠를 맨 자들은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세자의 과실을 정확히 알게 했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 전에 과인에게 이런 일을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을 보기에 부끄럽지 않나?”

   
     

사악한 나경언이 일순간 충신이 되고 말았다.

홍봉한이 나서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글을 두어서 어디에 쓰겠사옵니까. 전하, 부디 불태우소서.”

노론의 공작이라는 증거물을 없애려는 수작이었다. 더구나 역사의 기록들을 불태우고 세초하는 건 원래 영조의 특기가 아닌가.

고변서에 쓰인 세자의 10가지 허물이 임금의 눈앞에서 순서 없이 스쳐갔다.

세자가 세자빈 홍씨洪氏를 죽이려 했고, 화완옹주에게 칼을 겨누어 위협하였으며, 생모 영빈 이씨에게 모질게 대하여 불효하였고, 여승 양제 가선假仙을 궁에 끌어들였으며, 궁궐 밖 서읍西邑의 여러 기녀들과 놀아나 풍기를 어지럽혔고, 몰래 평양원유(관서행)를 하여 평안 감사 정휘량을 만났고, 북성北城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 일, 환관 박필수와 친구가 되어 왕실 권위를 실추시킨 일, 금지된 책들을 탐독하여 주변에 사사로운 기운을 사주했고,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세자궁 땅 속에 집을 지어 군기붙이를 축적하였으며, 특히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고 역모자는 주액에 있다. 역모자는 서徐 김金 이李이다.

임금은 이 어지러운 문장들과 뒤틀린 어휘로 인해 심한 충격에 빠진 척 얼른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상 여기엔 1차로 형조에 올린 고변서 내용에 더 추가시킨 다른 내용이 있었지만 영조는 더 알아볼 뜻이 없었다.

마침 판의금 한익모가 나서서 문제를 제기했다.

“전하, 친국을 시작하기 전에 의금부에서 이자의 몸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아 이런 흉서가 장전帳殿(임금의 임시천막)에까지 들어오게 했으니, 의금부의 담당자부터 가려내어 처벌해야할 줄로 아룁니다.”

한익모의 말이 타당하기 때문에 임금이 당황하자 홍봉한이 한익모를 나무랐다.

“판의금은 이 화급한 난국 상황을 보고서도 어찌하여 전하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혼란을 부채질하는가?”

하지만 한익모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 나경언이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전하를 속여 세자를 핍박했으니 그 죄로 말하면 죽여야 마땅합니다. 엄하게 다스리소서.”

홍봉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좌의정 윤동도도 불편한 시선을 거두며 판의금 한익모를 은근히 편들었다. 윤동도는 소론의 영수다.

“전하, 판의금의 말과 같이 해야 국청의 체통이 바로 섭니다.”

그때 사서 임성이 나서서 한익모의 말에 덧붙였다.

“전하, 이런 흉악한 말을 어찌 나경언이 혼자서 지어냈겠습니까?”

한익모가 다시 임금께 아뢰었다.

“전하,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조사하여야 하옵니다.”

대사간 이심원도 한익모를 옹호했다.

“전하, 꼭 캐내서 나경언의 뒷배를 보아주는 세력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한익모, 임성, 이심원 모두 세자를 핍박하는 흉악한 말을 지어낸 나경언과 뒷 세력을 조사하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홍봉한의 말을 따랐다. 영조로선 세자를 폐위시킬 절호의 기회를 잃으면 안 되었다.

“너희들이 임금께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더냐? 금오랑金吾郞(의금부 도사)은 조사를 하되 한익모가 과인의 판단을 흐리게 했으니 심문하고 파면하라.”

분위기가 정리되고 나경언이 묶인 채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조가 드디어 국문을 시작했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처럼 했으니 정성은 가상하다. 그러나 처음 올린 글에 말을 덧붙여 사람을 악역의 죄과로 모함했다. 또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는 등의 말로 임금을 당황케 하였으며 궐문을 호위케 하고 도성이 들끓게 했으니 앞으로 불충한 무리들이 네 버릇을 본받게 될까 두렵도다.”

절차를 무시하고 임금과 일대일 대면을 한 역적행위가 나라를 위한 정성이라니. 소가 웃을 일이었다. 잘 하면 귀양을 갈 것이고 잘 못 되면 토사구팽, 즉 목이 잘려 죽을 테지만 아직은 각본대로 돌아가는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나경언이 미소를 지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임금을 슬그머니 올려보았을 때다. 영조의 목소리가 순간 벼락같이 떨어졌다.

“이놈을 곤장으로 치라. 그리고 문랑은 내게로 오라.”

몇 대의 곤장이 나경언의 엉덩이에 작렬했다. 그가 이번 거사를 위해 받아 챙긴 돈의 액수에 비하면 이쯤의 고생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랑(의금부 수사관)이 다가오자 영조는 그를 통해서 죄인에게 질문했다.

“서徐, 김金, 이李 세 사람은 누군가?”

“徐는 서명응, 金은 호리의 아들 김유성인데 전에 귀양살이 중에 익사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李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오호라!

임금이 크게 한탄했다. 국문장 한켠에 설치된 천막으로 들어간 임금이 의자에 털썩 앉아서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정녕 이런 아들을 키웠단 말인가? 하나 뿐인 아들이, 마흔한 살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이렇게도 애비의 마음을 몰라준단 말인가? 열다섯 살 때부터 믿고 청정을 시켰고 조선의 역사에 유래가 없는 시강원(세자 전담 교육기관)까지 설치해서 키웠건만. 이런 불효 불충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영조가 가슴을 치며 애통해했다.

기회를 놓칠세라 홍봉한이 가까이 다가왔다.

“동궁이 만약 이 소식을 듣는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동궁께는 평소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결코 편안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가서 전하의 성교를 전해 진정시키게 해주십시오.”

영조가 모기소리로 명령했다.

“그리하라.”

   
  송강호 유아인이 의기투합한 영화 '사도'에서  

홍봉한의 말을 죄다 들은 세자 선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하지만 모함의 진위를 떠나 논란이 된 이상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대죄였다. 그 상황에선 그것만이 유일한 타개책이었다. 또한 그것은 어려서부터 부왕과 세자 사이에 합의된 효도법이었다. 세자는 즉시 홍화문에 나가 엎드려 대죄했다. 영조가 나경언이 있는 국청 현장으로 세자를 불렀다. 하지만 홍봉한이 죄인을 세자와 함께 같은 뜰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자 임금이 나경언을 옥에 가두게 했다. 대질을 하다가는 자신들의 의도가 뒤틀릴까 염려한 홍봉한이 머리를 쓴 것이다. 그 사이 세자는 죄인임을 드러내는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국청 뜰로 가 엎드렸다. 영조는 등을 돌리고 세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승지가 나서서 세자가 대령했음을 아뢰자 그때서야 임금이 세자에게 호통을 쳤다.

“네가 왕손의 어미(경빈 박씨 빙애)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궐에 불러들였으며 평양에 행역하고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게 어찌 세자로서 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이 모두 내게 입을 다물고 속였으니 나경언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네가 처음엔 왕손의 어미를 매우 사랑해 우물에 빠진 듯하더니 어찌하여 죽여 버렸느냐? 강직한 사람이라서 네 행실을 간하다가 이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이 아들을 왕손이라고 데리고 와 문안할 텐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세자는 속에서 분통이 터진 듯 얼굴을 심하게 붉히며 한참 동안 황소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윽고 세자가 아뢰었다.

“아바마마, 부디 진정하옵고 나경언이란 자와 대질을 좀 시켜주십시오.”

하지만 임금의 반응은 썰렁하기만 했다.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가 어찌 만고의 죄인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임금은 나경언과 얼굴을 맞대어도 괜찮고 세자는 안 된다는 논리도 역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흑흑흑흑.

억울함이 피눈물이 되어 세자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신이 오래 전부터 가져온 화증火症 때문에 일어난 일일 뿐이오며 하등의 연관이…….”

임금이 거기서 세자의 말을 싹둑 자르며 더 크게 꾸짖었다.

“차라리 미쳐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눈앞에서 썩 물러가라! 내관들은 어서 끌어내지 않고 뭣들 하느냐!”

신료들 앞에서 당하는 모독치곤 너무 심했다. 세자가 정말 미치길 바랐다는 말이야말로 신하들 앞에서 수십 년 동안 세자를 폄하해온 언행의 완결판이었다. 임금이 어떤 생각으로 세자에게 모멸감을 주었는지 임금 자신만이 알 것이다. 어쨌거나 13년 동안 대리 청정을 해온 왕세자로선 이 날 이 순간이 최악의 품위 손상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세자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지 오래 되었고 그래서 생긴 가슴앓이는 해가 갈수록 커져만 가는 상황인데 오늘도 세자는 마냥 가슴만 막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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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선구(59) 프로필

전북대 의대 졸업.
2007년 <계간 문예>로 등단
장편소설 <시의 칼레누스>, <베네치아 코텍스>, <왕릉의 잔>, <사자의 춤>(전 3권), 등과 단편 소설집 <유리병 속의 코끼리>, <욕망을 팝니다> 발표
<계간문예> 소설문학상, 아시아황금사자문학상, 하이네 문학상,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장려상), 한국PEN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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