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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함의 수용 75] 훗날 그것도 역시 흉몽이었음이 드러나고 만다
2017년 07월 05일 (수) 22:41:24 이선구 okesk@naver.com
   
     

해가 바뀌어 영조 38년(임오년, 1762년) 5월 22일 경희궁.

날씨는 쾌청하고 시각은 진시(7-9시).

봄 빛깔이 완연하게 수목을 물들인 가운데 하루가 평온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궁궐 뜰 안의 가지각색 꽃들도 벌을 끌어들이느라 한창이었다. 자연은 궁궐 주인의 뒤틀린 심사를 알 리 없다. 과연 예순아홉 인생이 덧없기만 한 임금은 자신이 아침에 꾼 호랑이 꿈이 차라리 개꿈이면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괜히 개잠을 잤다.”

개잠이란 새벽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지는 걸 말한다. 인삼의 부작용인 불면증 때문인데도 영조는 애꿎은 수면 습관만 탓했다. 아침에도 건공탕을 마셨건만 늙은이 몸뚱이라 골골하고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는 듯했다. 영조는 입진(진찰)을 받아볼까 망설이다 말고 설핏 몇 년 전에 미행을 하다 보쌈질 당할 뻔한 일을 떠올렸다.

아흠.

영조는 하품을 길게 했다. 조강朝講(임금과 신하가 유교 경전이나 역사책을 강론하는 일)을 미리 취소했기 망정이지 나이가 많아선지 아니면 봄의 노곤함 때문인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영조의 기억은 자꾸만 전에 미행한 일을 뒤쫓고 있었다. 칠팔 년 전 그날 청계천 미행 때 객주에서 만난 김상재란 애꾸눈 착호갑사(호랑이 사냥꾼)가 떠올랐다. 그날 약속을 했건만 그자는 영영 임금 왕자가 선명한 구지의 호랑이를 잡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순화방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영조는 자신의 잠저 창의궁 방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소문대로 내가 김춘택의 아들이고 김상재도 김춘택의 아들이라면 그자와 내가 이복異腹이란 말인가? 흥!”

호랑이 꿈을 꾼 날은 항상 뭔가 좋지가 않았다. 영조는 예전에 호랑이 꿈을 꾼 날들을 돌이켜보았다. 재위 4년(1728년)의 일로서 효장세자가 10살 나이로 죽었을 때와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때, 재위 15년(1739년)과 16년(1740년) 양위소동 때, 재위 28년(1752년) 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이 딱 3년을 살고 죽었을 때, 재위 31년(1755년)에 일어난 ‘나주 벽서 사건’ 과 ‘토역경과 상변서 사건’, 영조 33년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승하와 부마 정치달(화완옹주의 남편)의 사망 때, 매번 그놈의 호랑이가 꿈에 나타났었다.

영조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또 다시 중얼거렸다.

“헌데 홍봉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한 날 꾼 호랑이 꿈은 길몽이잖아!”

재위 20년에 세자빈으로 풍산 홍씨 홍봉한의 딸(혜경궁)을 맞아들이던 날도 호랑이 꿈을 꾸었고 영조는 여태껏 그 꿈만큼은 유일하게 길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훗날 그것도 역시 흉몽이었음이 드러나고 만다. 자기 남편 사도세자를 감시하고 글월비자를 시켜 정보를 시시각각 노론에 전달하여 친정 집안과 노론의 정치적 성공만을 도모했던 여자를 세자빈으로 맞이한 것은 영조의 실수 중에 큰 실수였다.

다시 생각하기 싫은 아침의 꿈이 저절로 떠올라 생생하게 전개되자 영조는 잇새로 신음소리를 흘렸다.

 

어흥- 어흐흥!

금(昑, 영조의 이름)이 혼자서 혜음령(임진강을 건너기 전 큰 고개) 고갯길을 넘어가다가 집채만 한 호랑이와 맞닥뜨렸다. 덩치가 우람한 그놈은 이마에 임금 왕자가 선명한 무늬를 하고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금을 향해 포효했다. 공포심이 엄습하고 뼈도 못 추릴 거란 생각에 금은 혼비백산하여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자기 힘으론 호랑이를 대적할 수가 없어 금은 등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평소에 무술을 연마하지 않은 탓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 싶을 때 호랑이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런데 총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땅!

포수의 총에 호랑이가 땅바닥에 쓰러지고 저만치서 건장한 포수가 나타났다. 눈을 번쩍 뜬 금이 그를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냐?”

“익익재(홍봉한의 호)입니다, 전하.”

포수 차림을 한 홍봉한 대감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금은 다시 놀랐다. 포수의 모습이 어느새 김한구 대감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때 나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영조의 회상을 단박에 깨뜨렸다.

“전하, 경기 감사 홍계희 대감 입시오!”

가뭄 대책 회의가 별궁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홍봉한의 얼굴이 김한구로 바뀐 꿈이 하도 이상하여 영조는 홍계희와 함께 경희궁을 나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신경이 과민한 탓이겠지. 사돈과 국구國舅가 날 구해주다니.”

하필 경희궁 동쪽 담장 쪽을 본 영조가 하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찔레꽃 무더기를 발견했다. 영조가 갑자기 멈칫하며 그쪽으로 다가가 꽃들을 쳐다보았다. 그랬다. 오래 잊고 있었던 일이 이제야 떠올랐다. 순간 영조의 주름지고 늘어진 눈시울에 물기가 고였다. 그것은 순정이가……, 자신이 목을 베어버린 순정이가 심었던 찔레꽃이었다.

-전하, 김씨 처자가 생각날 때 보시라고 심었는데 괜찮겠사옵니까?

무심코 지나친 지난 수십 년 세월 동안 크게 번성하여 이렇듯 큰 무더기를 이루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흔히 하는 말로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아름답다 했던가. 연잉군 시절에 사랑했던 향재 처자……,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꽃무더기 앞에 겹쳐지면서 아찔한 향기가 코청을 찔러댔다.

갑자기 허든거리는 임금을 부축한 승지와 주서가 소리쳤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그만 손을 놓거라.”

미상불 그리움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고운 자태를 떠올릴 때면 꼭 아픔이 칼날처럼 영조의 가슴을 찔러댔다. 하필이면 경종이 승하한 시각에 그녀가 세상을 뜬 바람에 자신이 그녀까지 죽인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안동 별궁 경연당에 도착하여 대신들과 회의를 주제하고 하교를 했다.

“엄인은 극심한 봄 가뭄을 암행暗行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내관 엄인을 파견하고 돌아와 차를 마시면서도 영조는 아침 꿈을 다시 되씹었다. 요즘 들어 새벽잠을 설치다가 깜박 개잠에 빠지거나 뜬 눈으로 날밤을 허옇게 지새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시작이 아마도 세손(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을 잃었을 때부터였으니 벌써 10년이나 된 습관이었다. 문득 영조의 머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며칠 전 정순왕후가 넌지시 물은 베갯머리송사였다.

“마마, 세자가 군기붙이를 많이 준비하여 땅 속에 숨겨두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아시옵니까?”

“그게 정말이냐?”

“제 눈으로 보진 못했습니다만, 궁녀들이 속닥거리는 소릴 들었습니다. 때를 보아 임금께 도전하는 정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그녀는 친정아비 김한구한테 들은 걸 궁녀들이 속닥였다고 둘러댔다.

오늘따라 홍계희의 행동도 이상하리만치 정중했다.

영조가 세자궁 쪽을 일별하는데 우연의 일치인 듯 홍계희도 음흉한 눈을 뜨고 세자궁 방향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만은 오늘 불어 닥칠 큰 폭풍의 조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홍계희가 침묵을 깨뜨렸다.

“전하, 가뭄 대책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하늘을 감화시킬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실상 봄 가뭄이 심하게 들어 조선 천지가 헉헉거리고 있었다.

“실은 과인이 부덕하여 가뭄이 오래 가는 것 같아 그게 두렵도다.”

임금은 행여 내일이라도 비가 와줄지 시선을 돌려 날씨를 점쳐보았다. 꿈이 이상하듯 시시각각 사뭇 다른 기운이 닥치고 있을 테지만 임금은 그때까지도 구체적인 걸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더더구나 이 절박하고 해괴한 일이 곧 벌어질 거란 사실을 사건의 희생자인 왕세자 선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삭삭삭삭.

   
     

청력이 약해진 까닭에 임금은 작은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지만 쉰아홉 살 홍계희는 급박한 발자국 소리를 알아차리고 반짝 엷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노론 전체가 준비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홍계희는 시치미를 뚝 떼고 소리를 못 들은 척 입에 문 차를 삼키고는 임금께 아첨을 했다.

“전하, 이렇듯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노력을 기울이시니 전하께옵선 요순임금의 경지에 다다른 군주이시옵니다. 압슬형과 낙형을 폐지하셨고,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도 금지시키셨으며, 농정의 기본방향을 잡기 위해 <농가집성農家集成>을 대량 인쇄하여 보급하셨고, 당을 보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시는 탕평책까지……, 이는 어느 시대에도 없던 일입니다.”

터덕 턱 턱.

“형조 참의 이해중인데 전하를 급히 뵈어야겠네!”

큰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내관에게 청대를 전해달라고 하는 소리가 안에서도 들렸다. 청대란 급한 일로 임금을 뵙는 걸 말한다. 소음의 주인공은 바로 홍봉한의 처남인 형조 참의 이해중이었다. 13년씩이나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를 배제한 채 곧바로 임금을 뵙자고 했으니 당연히 보고체계를 무시한 처사였다. 임금의 사돈이며 노론당老論黨의 영수인 영의정 홍봉한의 권위에 이해중까지 이미 덩달아 꺼들먹거리는 세상이었다. 그가 고변서告變書를 손에 쥔 채 숭정전 돌계단 아래 우뚝 섰다. 이날 그와 함께 입궐한 그의 매형 영의정 홍봉한은 빈청에 숨어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해중은 서둘러 달려온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뚝 서서 숭정전을 계속 올려다보았다. 사안의 심각성 때문인지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내관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허겁지겁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곧 이어 내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숭정전 전각을 한 번 맴돌았다.

“전하, 형조 참의 이해중 대감이 청대하였사옵니다.”

지금이 아주 심각한 사태의 시작인데도 예순아홉 살 임금은 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평소 자질구레하게 여기 저기 자주 앓던 병줄 때문인지 그날도 임금은 여전히 느릿느릿 움직였다. 머리가 허옇게 세었고 피부조차 푸석거리다 못해 주름투성이인 이 늙은 임금이 어디에 힘이 있다고 4년 전 처녀장가(정순왕후 김씨, 당시 나이 15세)를 들었는지 문무백관 누구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 가까이 앉은 홍계희는 여전히 못들은 척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안에서 아무 기척도 없자 이해중이 다시 요구했다.

“내관, 전하께 아뢰어주게. 화급한 일로 청대를 해야한다고.”

내관이 어좌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전하, 형조 참의 급히 청대하였사옵니다.”

청대라고 했나?

임금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놈의 청대 제도는 누가 만들어 당파싸움이 그칠 날이 없는 것인지……. 청대란 말에 임금의 가슴은 빠르게 방망이질을 했고 새벽녘에 꾼 호랑이 꿈이 설핏 떠올랐다. 하지만 목이 잠겨 있어 된침을 삼키는 순간 밖에서 내관과 참의의 목소리가 다시 터졌다.

“이보게, 전하께옵서 쉬이 알아차리시도록 더 크게 아뢰어주게!”

“전하, 형…….”

그제야 홍계희가 고개를 문 너머로 돌림과 동시에 임금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들라 이르라!”

툭 탁 툭 탁.

종종걸음으로 입시한 이해중의 몸에 땀이 흥건했다. 영조가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이른 시간에 무슨 소란인가?”

“전하, 큰일 났습니다. 이 ‘고변서’를 좀 보십시오. 나경언이란 자가 형조에 보낸 투서 그대롭니다.”

순간 용안이 해쓱해진 영조가 ‘고변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읽고는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불궤한 모의라니!”

영조가 침을 튀겼다. 이어서 영조가 어떤 결심을 표시했다.

“변란變亂이 주액(팔꿈치와 겨드랑이)에 있게 되었으니 도대체 이게 사실이라면 내가 친국을 해야 하겠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임금이 주먹으로 상을 내려쳤다.

탁!

하지만 홍계희는 웃음을 깊이 감추며 깜작 놀란 척만 했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뢰었다.

“전하, 사안이 위중하오니 즉시 금군에 명하시어 호위케 하심이 어떠실는지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궁성을 호위하는 일은 무신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때도 행하신 일입니다.”

당황한 영조가 큰 소리로 명령했다.

“여봐라, 도승지 들라 이르라. 성문과 세자궁의 문을 모두 잠그고 군사로 하여금 궁성을 포위하도록 하라! 그리고 형조에서 나경언이란 자를 즉시 끌고 오라.”

   
     

금위군이 나경언을 체포하러 간 사이 영조는 가슴을 치며 고통스러워했다. 임금은 이 보고체계가 과정을 제대로 밟은 것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았다. ‘변란’이란 단어의 무게에 눌려 씩씩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늙을 대로 늙고 생각조차 굳어질 대로 굳은 영조가 행한 첫 대응은 오로지 변란에 대한 과민반응이었다.

영조에게 진정할 것을 권한 사람은 홍계희였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제 그만 진정하시옵소서. 사태를 차근차근 풀어 가시면 될 것입니다. 미력한 신하들이 사력을 다하겠사오니 부디 마음을 가라앉히시옵소서.”

“알았다. 나경언이 대궐 하인 나상언의 친족인가?”

내시가 대답했다.

“나상언의 형으로서 전에 대궐 하인으로 있던 자입니다.”

영조가 방석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오른 팔을 벌벌 떨었다. 예순이 넘으면서부터 심하게 긴장했을 때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임금이 인삼 찻잔을 덥석 집어 벌컥벌컥 소리가 나게 마셨다. 주액이란 팔꿈치와 겨드랑이를 뜻하므로 곧 세자를 지칭한다. 세자가 부왕에게 역모를 해? 영조는 헛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전부터 지켜보았던 영조로선 세자의 치밀하지 못한 행태가 졸렬하게 보여서 비웃음조차 나왔다.

허, 허- 허허허허!

“이 무슨 가소로운 짓이란 말이냐?”

임금이 주절거렸다. 헛웃음과 비꼬는 말투, 장황한 언변이야말로 즉위하기 전 청년시절부터 가져온 영조의 오랜 습관이다. 이해중과 홍계희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살폈다.

마침내 환관이 아뢰었다.

“전하, 영의정 홍봉한 대감 입시요!”

이해중과 홍계희가 앉은 반대편에 쉰 살 홍봉한이 허리를 구부리고 비참한 표정을 지은 채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신 홍봉한 대령입니다. 마침 궐 앞에서 급히 군사를 거느린 금군위장과 마주쳐서 사정을 좀 들었습니다. 이 불미한 일이야말로 신이 성상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발생한 문제입니다. 황공하오나 전하께옵서 저희에게 방도를 가르쳐주십시오.”

사전에 모의를 해놓고서 조금 전에 금군위장에게 사정을 들어서 알았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영조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조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론이 경종을 제거하듯 세자를 폐위시키기 위해 모사를 꾸미는 게 틀림없었다. 불감청고소원, 이라고 했던가. 청할 수는 없지만 속으로 진정 바랐던 일이란 게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지만 세자가 폐위될 경우 그 책임을 세자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기술적인 문제가 필요하다 싶어 영조는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자식을 잘못 가르친 아비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영조가 입술을 부르르 떨며 한숨을 흘렸다.

“자식의 도리를 어찌 세상의 부모가 다 책임질 수 있겠사옵니까?”

마치 각본을 읽듯 어쩌면 이토록 임금이 원하는 대답을 잘도 하는지, 홍봉한의 이 말은 세자가 곧 주모자라는 의미지만 영조는 이에 대해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아니다. 자식의 잘못은 모두가 부모의 탓이다. 아버지가 자식의 근본이라는 부위자강父爲子綱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아버지는 마땅히 자식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홍봉한이 건의했다.

“행여 세자께서 지어지앙池魚之殃 격으로 의심을 받고 계시는 건 아니신지요?”

연못 속 물고기가 당한 뜻밖의 재앙이란 뜻이다. 춘추시대 송의 사마 벼슬을 하는 사람이 진귀한 보석을 가지고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다.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보석에 탐이 난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아 족치게 했으나 그는 보석을 연못에 던졌다는 말만 했다. 그래서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게 했지만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 일과는 무관한 물고기들이 죽게 되었다.

지어지앙, 이란 사자성어야말로 이 상황에 교활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노론에서 임명한 사관이 기록하기엔 시의적절한 표현이었다. 이와 반대로 영조의 머릿속에선 세자 선愃의 불미스런 행위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영조의 분노는 이내 머리끝에서 불길이 치솟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작년 봄에 있었던 세자의 관서행關西行(평양원유)만 생각하면 심장이 터지려고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 왕권에 대한 중대 도발이 아니었던가. 세자의 무인 군주 모습도 참기 어려운 마당에 허락 없이 평양에 여행한 일은 하마터면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에 하나, 잘못 꼬여서 중원의 신흥제국 청나라를 자극하는 원인이 되거나 노론당의 주장처럼 세자가 무력으로 모반을 꾀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조선이 위태로울 뿐더러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 하루아침에 묵사발이 되는 것이다.

-조선의 하늘 아래 왕이 둘일 순 없어. 내가 상왕으로 올라앉자니 소론이 새 왕을 등에 없고 피바람을 일으킬 것이고, 이대로 대리청정을 유지하자니 그 또한 피차 고통스런 일이구나. 벌써 13년 째 청정이 아닌가!

중얼거리는 영조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예순아홉 살 나이에 비하면 아직은 정정하고 기력이 넘쳐 보이는 것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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