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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함의 수용 72]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심'
2017년 05월 19일 (금) 07:50:13 박용근 기자 okesk@naver.com
   
     

다음날 아침 늦잠에 빠진 이선을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마마, 기침하셨사옵니까? 휘량입니다.”

“흠흠. 새벽에야 눈을 붙인 바람에 좀 늦었다. 어서 일어나 세안을 해야겠구나.”

4월 초순의 평양 날씨는 화창하고 맑았다. 이선은 기지개를 펴보고 자신이 평양에서 첫 밤을 보냈음을 실감했다.

“동궁마마, 며칠 전 내린 비로 농사철이 시작되었으니 아침을 드시고서 평양 근교의 농사 현장을 시찰 나가시겠습니까?”

인사를 하는 척 정휘량은 세자의 얼굴이 탱탱 부은 걸 확인하고 또 했다.

“좋다. 관서지방은 경기도보다는 한두 순 농사의 시작이 늦은 것 같군. 현장에 나가거들랑 왕세자가 납시었다는 말은 일체 삼가주게.”

말을 탄 세자와 감사, 내관과 병졸들을 동반한 가마가 논두렁에 멈추었다. 감사의 시찰을 미리 말해주지 않아 농민들도 당황했지만 세자에겐 큰 볼거리였다. 두엄을 논과 밭에 뿌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작년의 벼 그루터기가 황소가 끄는 쟁기질에 뒤집혀서 좋은 모양새로 골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열두 살 때가 생각나는군. 그 해도 가뭄이 아주 심했어. 후원에서 벼 심는 행사에 참가했지. 아바마마께서 물으셨어. ‘농사짓는 일이 왜 힘들다고들 하는가?’ 하고. 무더운 여름이라 물이 펄펄 끓듯이 뜨거운데도 농사꾼들은 농기구를 가지고 일을 하는 그 고생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 아바마마께선 따라온 유신에게 <시경>의 ‘칠월장’을 읽게 했어.”

정휘량이 이내 알아차리고 추임새를 넣었다.

“내 아내가 아들과 함께 저 남쪽 이랑으로 들밥을 지고 오면 농사 맡은 관리가 와서 보고 기뻐하네, 어쩌고……, 하는 대목 말씀이십니까?”

“잘도 아는군. 조재호 대감께서 내게 가르치실 때 언젠가 이런 문구를 가르쳤네.”

爾應多岐 이응다기

事有義利 사유의리

心有公私 심유공사

操心處事 조심처사

必審基幾 필심기기

 

정휘량이 즉시 해석을 붙였다.

“너는 응당 많이 망설이겠지. 일에는 의리가 있고 마음에는 공심과 사심이 있으니 조심해서 일을 처리하되 반드시 그 기미를 살펴야 한다. 마마, 이 시구를 조 재상께서 가르쳐주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옵니까?”

정휘량이 은근히 세자를 떠보았다. 노론들 사이에서 떠도는 나쁜 소문 즉, 세자가 행여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내용을 정휘량이 모를 리 없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날을 돌이켜보란 뜻이지. 잠들기 전에 말이야. 이런 시구도 가르쳐 주었네.”

 

如有差失 여유차실

悚然省念 송연성념

若基無違 약기무위

益加收斂 익가수렴

 

실수함이 있었다면

두려워하며 반성할 것이다.

잘못한 일이 없었다면

더욱 더 자신을 가다듬어라.

 

“그런 깊은 뜻을 듣고 보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정휘량은 차마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 조재호를 폄하할 수가 없었다. 이미 조정을 떠나 은둔하고 있는 이상한 분이지만, 혹시나 세상이 변해서 다시 소론이 잡는 때가 온다면 몰라도 지금으로선 조재호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정휘량은 지난밤 늦게 잠들었다. 왕세자가 평양을 방문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해가 중천에 이르자 세자가 정휘량을 돌아보았다.

“이만 가마를 돌이키는 게 좋겠다. 세참 시간이 되어 가는데 우리가 불청객 노릇을 할 순 없지.”

   
     

먼데서 달구지와 지게에 세참을 실은 머슴들 모습이 보이자 세자가 가마에 올랐다. 가마가 다다른 곳은 대동강변의 한 정자였다.

이름 하여 연광정練光亭.

“저하, 이곳이 임진왜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 현장입니다.”

대동강의 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봄바람에 강물조차 깊고 푸르게 보였다.

“나도 알지. 왜놈들이 불을 질러 태워버린 것을 선조 임금께서 중건하셨지. 곱디고운 단청의 깨끗한 맛이 지금도 남아 있군그래.”

세자가 갓을 벗어 마루에 내려놓았다. 누가 보아도 보통 선비로만 보일 뿐, 왕세자란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기생 계월향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

“왜장의 목을 베도록 술수를 부린 다음 자결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계월향 이야기를 알고 있네. 그리고 남강에서 적장을 껴안고 물로 뛰어든 논개 이야기도 그렇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녀자들의 가상한 애국심을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할 뿐이지. 조선은 꿋꿋한 충절과 의기로 넘치는 나라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저하.”

“사실 나라의 흥망성쇠도 바로 조정대신들의 충절에 달려있다.”

“네에?”

어감이 조금 이상한지 정휘량이 주춤했다. 지금 조정에는 간신들로 가득 찼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자의 눈이 정휘량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휘량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지금 조정에선 너나없이 모든 교훈들을 먼 데서 차용하느라 급급하다.”

걸핏하면 사서오경의 한 대목을 빗대어 말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를 비꼬았다고나 할까. 실상 그 모양새에 있어 임금이고 대신이고 예외는 없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조선의 식자들은 ‘먼 것에 힘을 쓰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는’ 타성에 젖어 있거든.”

“그 반대로 해야 한단 말씀이시온지요?”

“당연하다. 공자가 말씀했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사물에서부터 진리를 찾는 방법 말이야. 하학상달下學上達이라고 하는.”

“아, 예!”

그제야 정휘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서가 아니라 인정한다는 의미일 뿐 정휘량은 속으로 여전히 머리빡만 굴리고 있었다.

“오래 전에 아바마마께서 내게 독서와 잔치 중에 무엇이 더 좋은지 물으신 적이 있었다.”

“뭐라 답하셨는지요?”

“모두 좋다고 대답했다. 물론 아바마마가 원하신 건 독서가 더 좋다, 는 대답이었겠지.”

“전하께서 까닭을 묻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잔치도 좋다고 한 까닭은 시연侍宴(연회를 보좌함)하여 즐거움을 받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대비나 임금이 즐거워하는 것을 받들 수 있어 좋잖아.”

“아, 그런 뜻이 있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시를 지었다.”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를 밝히고

달은 중천에 솟아 만산을 비추도다.

“저하께서 태학에 입학하실 때 축하하는 의미에서 전하께서 반수교에 세우신 시비의 구절이 떠오릅니다.”

 

周而弗比, 乃君子之公

心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심이고,

편벽되어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소인의 마음이다.

 

정휘량의 시 읽는 목소리가 끝나자 세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바마마는 내가 왕위를 이었을 때 당쟁이 심해질 거라 예상하고 염려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군자의 마음을 가지라고 주문하신 것이지.”

하지만 ‘임인옥안(목호룡 고변사건 수사기록)’에 대해 영조 자신은 시종일관 반전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처음 의도와는 정반대로 편벽된 소인의 마음만 품었으니 그것이 헛수고(徒勞)가 아니면 무엇일까?

때마침 세자의 눈길이 편액의 글씨에 멈추자 정휘량이 후닥닥 답변에 나섰다.

“저하, 고려조 문신 김황원의 싯귀이옵니다. 미완성 시온데, 훗날 누구든 덧붙여 지으라고 했답니다.”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긴 성벽 쪽으로는 늠실늠실 강물이요

넓은 들판 동쪽 머리엔 듬성듬성 산들이네

“허허. 누구든 시를 잘 짓는 자가 나와서 덧붙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직도 감히 시를 짓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답니다.”

“허헛. 그것 참 평양의 명물 가운데 명물이구먼. 김황원이 청백리였기 때문에 그의 선비정신을 누구도 감히 범접하기를 꺼린 때문일까?”

김황원은 청렴하고 강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고 만년에 이르러 은둔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세자가 알거라 예상하지 못한 정휘량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저하, 진짜 선비란 어때야 합니까?”

“나도 배운 대로 전할 뿐이네. 어느 날 자공이 스승 공자께 선비(士)에 대해 물었다네.

   
     

-어떻게 해야 가장 훌륭한 선비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행위에 반드시 도덕규범이 있어야 하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 임금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해야 비로소 선비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동족친척이 그를 일컬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거나, 이웃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어른을 아낌없이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한다면 훌륭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말을 가려서 하고, 행동에 고집이 있어야 한다. 이는 비록 시시비비와 흑백을 불문하고 자신의 언행을 관철하는 소인이지만, 역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즈음의 의정부와 육조는 어떻습니까?

-그릇이 작은 사람들이라 가히 들먹일 가치조차 없다.

 

“저하, 듣고 보니 세자시강원의 관원들이 정말 우러러보입니다.”

정휘량은 감탄했다. 실제로 정승들은 임명되면서 동시에 당연직 왕세자 사부가 되므로 정승들을 빼고 세자시강원 선생들을 칭찬한 것도 세자를 떠보는 술책이었다.

낮부터 마신 술로 해가 지자마자 세자가 휘청거렸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내관들이 후닥닥 세자를 부축했다.

“괜찮으니 날 붙들지 말라.”

잔잔한 대동강 물에 달이 둥실둥실 떠 있고 한양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정휘량이란 자는 아무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반대로 해석하면 조재호 대감의 운신의 폭도 좁아졌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궐내 노론세력의 급속한 팽창을 의미하기도 했다. 술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데도 의식은 자꾸만 또렷해져가고 있었다.

세자는 숙소로 돌아와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이 정휘량을 찾아온 의미는 이미 퇴색하고 없었다. 차라리 여경방餘慶坊의 객줏집을 찾아갔더라면 삶의 현장에서 배어난 풋풋한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들려왔을 테지만 어쩌다가 이 먼 곳까지 제 발로 들어와 잔머리 굴리기에 바쁜 소인배小人輩를 상대하고 있는지, 자기 스스로도 한심했다.

-어쩌면 부왕의 눈 밖에 난 세자를 돕겠다기보단 짐 덩어리쯤으로 여길지 모르겠군. 내 말에 좀 더 진지하게 귀만 기울였어도 훗날 크게 써줄 텐데.

다음날은 부벽루 관광에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미향이와 기생 몇이서 대기하고 있었다. 한낮의 햇빛이 대동강 물에 반짝 반짝 윤슬을 넓게 만들고 있었다. 거문고를 타던 미향이 악기를 내려놓고 세자에게 다소곳이 말을 건넸다.

“마마, 소녀의 잔도 받으십시오.”

“고맙다. 여기서 보니 경치가 참말로 좋구나.”

미향이 술을 따르는 동안 세자는 미향의 미모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마마, 이곳은 사실 밤에 와야만 제 맛입니다. 여기서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달과 강물에 뜬 달을 한꺼번에 즐길 수가 있거든요.”

“허허허. 세월이 허락해준다면야 너와 단 둘이 달이 뜬 밤에 여기서 만날 수도 있으련만.”

“호호호. 소녀도 그날이 어서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사옵니다. 훗날 임금이 되시거든 소녀의 이름을 잊지나 말아주십시오.”

그녀의 덕담에 세자는 우울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마. 그땐 내 수청도 들어주려무나.”

“마마, 함께 온 소녀들을 소개해 올리겠사옵니다. 풍월이, 아리수, 혜원, 목단입니다.”

평양의 제일가는 기생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는 창을 하거나, 장구를 두드리거나 하면서 흥을 돋웠다. 이선이 눈을 지그시 감고 거문고 가락에 귀를 기울인 듯 보였지만 실은 함경도 방향을 향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친 김에 함경도까지 가볼까? 평안감사는 이미 틀린 것 같고, 함경도 관찰사를 만나면 혹시 북벌의 웅대한 꿈을 펼칠 정보를 가르쳐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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