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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함의 수용 70] 정휘량의 눈동자에서 세자는 불안감을 느꼈다
2017년 04월 05일 (수) 20:14:43 박용근 기자 okesk@naver.com
   
     

아전들이 뛰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의 내로라는 기생들이 들어왔다. 다만 이목이 있어 풍광이 좋은 능라도나 을밀대에는 가지 못하고 있었다.

옆방에선 내관 두 사람이 행여 세자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는지 바짝 긴장한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이미 해는 졌고 등불 아래 거문고 타는 소리가 은은하고 분위기가 한층 올라왔지만 세자의 기분은 영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자는 평양 기생들의 미모에 홀리지 않았다. 그녀들의 교태와 노래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세자는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한양 나리께선 재미가 없으시나 봅니다.”

거문고를 튕기던 기생이 거문고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허허. 내 얼굴에 그렇다고 씌어 있느냐?”

세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요. 세상의 예쁜 계집과 불사약不死藥을 모두 맛보셨다면 더 이상 세상 살 맛도 없을 것입니다.”

“그 무슨! 세상에 불사약도 있다더냐?”

세자의 핀잔에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요. 제 이름은 미향이옵니다. 저는 아침저녁으로 늘상 먹고 있는데 나리께선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구부러진 소나무의 이슬이 떨어져서 땅 속에 스며들면 천 년 만에 복령이 되지 않습니까? 인삼은 모양이 단정하고 빛깔은 붉어 요부의 가랑이 같고, 구기자는 천 년이 되면 사람을 보고 짖는다지요?

그 세 가지 약을 모두 먹은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는 그걸 먹었지만 음식을 안 먹어 100일 만에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이웃 할머니가 와서 보고는 ‘그대의 병은 배가 주려서 생겼소.

옛날 신농씨가 온갖 풀을 다 맛보고 비로소 오곡을 뿌렸으니 대체로 병을 다스림에는 약을 쓰고 주림을 고치는 데는 밥이 으뜸이라오.

이 병은 오곡이 아니고서는 치료하기 어렵겠네.’ 하고서 한탄을 했답니다. 그제야 그가 일어나 쌀로 밥을 지어 먹고 죽음을 면했으니 불사약치고 밥만 한 게 없지 않겠습니까?”

“허허허허. 넌 얼굴만 예쁜 게 아니로구나. 어디서 그런 말들을 주워들었느냐?”

세자가 크게 웃어주자 그녀도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대성산 광법사에 있는 제 친구한테 들었습니다.”

“친구? 비구니란 말이냐?”

“아니옵니다. 이야기를 하면 좀 길지요. 그녀는 머리만 깎았을 뿐 여승이 아닙니다.”

“허허허. 거참. 희한하군. 중도 아닌데 절에 무엇 하러 있지?”

“나름대로 도를 닦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온갖 지식이 넘쳐서 머리가 무겁답니다. 그래서 아마도 무게를 줄어보려고 머리를 삭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호호호호.”

세자는 그녀가 마치 자기처럼 속에 울화가 있어 바람을 쏘이고 나면 돌아오곤 하는 사람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러면 내일이라도 그 처자를 데려올 수가 있겠느냐?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한번 듣고 싶구나.”

정휘량은 기생들을 모두 내보냈다.

“저하, 저 가운데 오늘 밤 숙청을 들 아일 보아두셨습니까?”

“그럴 것 없네. 내가 평양에 온 것은 그냥 바람이나 쏘이려는 것이고 가슴에 쌓인 먼지와 한숨을 털어내려는 것뿐이네. 내 하고픈 대로 내버려 두게.”

정휘량이 고개를 숙였다.

“마마, 술을 더 올릴까요? 잠시 후면 저녁식사 겸 준비시킨 백숙이 들어올 것입니다.”

“고맙군. 그대는 전하께 곧은 말을 줄곧 아뢰었던 충신이 아닌가?”

“저하, 그렇게 기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7년 전(영조31년 7월) 계집종이 흉서凶書를 하나 대문 앞에서 주워온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전하께 보고하고 불살라버렸습니다.”

세자는 어렴풋이나마 기억해냈다. 그가 그때 아바마마의 신임을 받아 호조판서에 기용되었고, 바닥난 호조의 경비에 관서(關西) 세미 만 석을 쓰도록 쾌히 승낙을 받았으며, 이조판서까지 올라갔다가 홍계희의 파직으로 공석이 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었다.

어쩌면 홍계희보다 더 아바마마의 신임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이르자 세자는 은근히 긴장했다. 홍계희와 홍봉한이 파직되거나 해임이 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인사 조치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가 이번 일을 빌미로 임금의 총애를 얻으려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세자가 정휘량을 찾은 것은 단 한 가지, 스승 조재호가 그의 후견인이란 사실에 있었다. 정휘량을 조정에 천거하고 이끌어준 거물 조재호의 반듯한 모습이 세자의 눈앞에 뚜렷이 겹쳐졌다.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세자 나이 17살 때(영조 28년 9월) 이조판서 조재호가 우빈객(세자의 교육기관인 세자시강원 정이품 문관 벼슬)으로 왔다. 세자 이선은 얼굴도 모르는 이복형 효장세자의 세자빈 조씨의 오빠 조재호를 보고서 품위에 압도되고 말았다.

-동궁마마, 조재호 인사 올립니다. 오늘부터 마마께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조재호가 엎드려 큰 절을 올리자 이선은 마음부터 울적해졌다. 효장세자는 이선이 태어나기 7년 전에 1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고 불쌍하고 가련한 세자빈만이 쓸쓸하게 빈전을 지키고 있었다.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게. 사방이 꽉 막힌 궁궐에서 매일매일 사서오경 공부만 하는 것이 뼈아프게 싫지만 이게 운명이려니 하고 있거든.

조재호는 엎드린 몸을 일으켜 바닥에 도로 앉으며 세자를 올려다보았다. 세자의 체격이 출중하기 때문에 조재호는 지그시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마마, 앞으로 왕이 되실 분으로서 그런 표현은 적절치 못하오니 부디 삼가주십시오.

벌써 교육이 시작되었나보다 싶어 이선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경종 임금께서 독살되셨다는 게 사실이오?

조재호는 세자의 질문이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곤란한 질문이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생각을 철저하게 감추었다.

-동궁마마, 훗날 때가 오면 말씀 드리겠사오니 오늘은 이만 신을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좋아요. 피곤하시고 또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싶겠지. 오늘은 그만 물러가오. 참, 잠깐! 평소에 조제론調劑論을 주장했는데 그게 무엇이오?

-조제론이란 제가 주창한 것이 아니고 원래 율곡 이이 선생의 이론입니다. 모든 당은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선류善類만 골라 쓰면 된다는 이론이지요.

정휘량은 이미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왕세자 폐위설이 심각하게 나돌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판단을 해야 이 기회가 영달의 기회가 될지 그는 부지런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도 좀 일찍 쉬어야겠네. 이틀 반을 내쳐 말을 달렸더니 허벅지와 오금이 뻐근하여 견딜 수가 없군.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덥히고 땀 냄새를 없애야겠어.”

정휘량은 감사 저택의 외빈 숙소에 군불을 땔 것을 명령하고 즉시 목욕물을 준비시켰다. 세자가 몸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것을 도와준 내관들은 세자의 명령으로 옆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세자가 방안에 가득한 퀴퀴한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는데 마침 평양 기생 미향의 방문을 받았다.

“저하, 박 내관입니다. 지금 막 미향이란 기생이 다시 왔는데 들여보내도 되겠사옵니까?”

“아니다. 오늘은 매우 피곤하여 그만 쉬고 싶구나.”

이쯤 되자 미향이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직접 창호지를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오면 저를 그냥 내시치렵니까?”

“절에 있다는 네 친구나 한번 만나보게 해다오. 오늘은 그만 물러가고.”

“한양의 종로 거리에서 최고 한량이시고 가장 풍류를 잘 아시는 마마께옵서 평양에서 제일간다는 기생을 그냥 돌려보내시다니요. 말할 수 없는 충격이옵니다.”

“그냥 가라는데도 그러는구나.”

“마마, 미향이 이만 물러갑니다. 나중에 꼭 불러주십시오.”

사뿐사뿐 버선발 딛는 소리가 가을 낙엽이 구르듯 멀어져갔다. 내관들이 대기하고 있는 옆방의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 이선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정휘량의 만만치 않은 눈동자에서 세자는 불안감을 느꼈다.

-내가 생각한 사람은 아닌 것 같군.

행여 사나이의 넓은 가슴팍 세계를 한 잔 술과 함께 토론할까 했던 자신의 생각이 뭔가 잘못 짚은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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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선구(59) 프로필

전북대 의대 졸업.
2007년 <계간 문예>로 등단
장편소설 <시의 칼레누스>, <베네치아 코텍스>, <왕릉의 잔>, <사자의 춤>(전 3권), 등과 단편 소설집 <유리병 속의 코끼리>, <욕망을 팝니다> 발표
<계간문예> 소설문학상, 아시아황금사자문학상, 하이네 문학상,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장려상), 한국PEN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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