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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자의 예술기행 31] 세 남자가 보낸 편지 ①..아니야. 아니야
2017년 03월 03일 (금) 22:34:09 박용근 기자 osong0670@hanmail.net

언제나 걱정되는 엄마. 얼마 동안 소식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기말 고사 시험 때문에 좀 빡빡하네요. 내년 3학년 진급을 위해 기말고사 준비에 사력을 다하고 있답니다.

마음은 2~3일 걸러 엄마에게 편지 띄우려 했는데 쉽지가 않네요. 엄마는 무슨 시간이 그리 없냐고 탓하시겠지만 사실 점심때 밥 먹는 일도 바쁘답니다. 대학원을 대비한 공부의 양도 많아지고 교수님들이 맡긴 일거리들도 많아서 하루가 짧아요.

그리고 데모에 대해서는 절대 안심하십시오. 2~3일전 건국대와 경희대가 크게 데모해 해외에서 받아드리기엔 불안하시겠지만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10월의 마지막 날, 2001년 작 160×100

 

물론 한양대학도 하루면 몇 번씩 술렁이곤 합니다. 민주의 의미를 모르는 엄마아들은 아니지만 전 지금 무엇보다 1~2 학년 때 뒤쳐진 성적 메우기에 고심 중이라 정신도 없고 조용히 시국을 관조하며 학업에 매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저번 치른 중간고사 성적을 본 교수님들도 완전히 신임도를 높여줬어요. 가장 중요한 과목인 분석화학 점수가 만점 가까이 나왔거든요.

엄마.

이런 아들을 걱정하는 건 시간 낭비예요. 엄마가 안 계시니까 그렇게 잘 걸리던 감기도 뚝이에요. 엄마보다 우학이가 옆에서 더 극성이라 원수 놈의 담배도 끊으려 해요. 약속할께요.

그러니 엄마도 아무 걱정 마시고 공부만 열심히 하세요. 섭섭하시겠지만 이곳에서는 엄마가 그리워하는 만큼 그리워하지들 않아요. 편지도 너무 자주하지 마세요. 막둥이도 중 3인데 제 할 일 멀쩡히 해내고 있으니까요.

엄마. 거꾸로 아빠나 막둥이, 제가 엄마 걱정에 마음 못 놓아요. 3류 드라마만 봐도 줄줄 눈물을 흘리다가 그 끝에 노상 배나 머리까지 아파 진통제 집어드는 여린 엄마가 말이에요

엄마.

사실 가을 접어들면서 엄마가 문득문득 보고 싶긴 했어요. 빠알갛게 물든 단풍잎을 주어온 우학이가 엄마에게 부치자고 권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젠 그나마 서울의 나무들도 마지막 잎사귀마저 모두 떨쳐 버렸네요. 이번 겨울은 조금 빨리 오려는지 이제 11월 중순 인데 영하를 웃도는 쌀쌀한 날씨군요. 곧 첫 눈이 내릴 것 같아요. 첫 눈 내리면 알려 드릴께요.

엄마.

타이페이의 날씨는 어때요? 제발 아프지 말고, 울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1986. 11. 17 엄마를 항상 걱정하는 아들 연 올림

동연이의 편지를 받은 다음 날 전주에서 동제와 소산의 편지가 함께 도착했다. 두 사람의 편지에서 받은 충격과 섭섭함은 동연이에게서 보다 훨씬 더 컸다. 대만에 지진이 크게 나서 남부 까우슝(高興)이 폐허가 되다시피한 며칠후였다.

오송.

   
 

전동집 정원에서 소산과 함께

 

지진 멀미는 좀 멎었는지 궁금하오.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그리 고생은 안 했을 것이오. 모든 면에 인내심이 부족한 당신이 걱정이오.

천지재변으로 일어나는 일 어찌 할 것이요. 나도 걱정은 되지만 그렇다고 전화로 울며불며 돌아오겠다니 지금도 철이 덜 난 게요?

앞으로 콜렉트콜로 전화하면 안 받을 것이요. 걸핏하면 공부를 중단시킨 나를 책망하던 자네가 두려워서 그곳까지 유학을 보낸 것은 결코 아니오.

나의 깊은 심중은 자네의 탁월하게 뛰어난 예술성을 키워주기 위한 목적이었소. 그리 하고 싶다던 공부 기회를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따위로 목적을 끊어버릴 작정이오?

그 따위 얕은 마음으로 자신의 결심을 이기지 못할 것이면 죽어 시체로 돌아오시오.

오송.

나도 당신이 필요하고 그립소. 40이 되어도 전혀 철들지 못하는 물정 모르는 자네에게 희망이 안 보이지만 이런 것 마저도 오늘은 귀엽게 접겠소.

오송.

제발 남편의 깊은 속뜻을 이젠 헤아려 정신 바짝 차리시오. 나도 두 아이에게 애비요. 자네보다 더 끔찍이 사랑하고 있소. 제발 애들에 대한 얇은 집착을 버리고 당분간은 공부에 전념하시오.

내가 당신 장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한 줄 아오? 대만 선생이 문제가 아니고 돌아오면 금추 선생께 착실히 공부하세요. 특히 금추선생의 인물화와 풍속화는 당신한테 큰 문화유산이 될께요.

비 국전파로 크게 부상하지는 못했지만 금추의 차원 높은 화법과 서법은 후세의 회화문화에 귀감이 될 것이요. 그러나 대북의 선생들도 소중하니 잘 받들고 나도 잘 해줄게. 자네를 위해서 말이야.

그 사람들도 내 깊은 우정과 아내를 사랑하는 내 정성에 감흡할 것이오. 그럼 몸조심하고 여기는 잊어버리고 공부나 잘하오.

겨울비 내리는 11월 29일 밤 소산.

섭섭함과 분노 같은 것이 가슴 밑쪽에서 치밀고 올라왔다. 그래도 동연이의 편지는 간간히 여자친구의 다정스러운 문구를 양념처럼 넣어 주었건만 게다가 얄팍한 봉투로 보내 온 막둥이의 편지는 너무도 근엄하고 무거웠다.

느닷없이 엄마를 어머니로 지칭한 문구 앞에선 먼 거리감을 느껴야 했다. 평소 제 형보다는 과묵하여 샌님이라 놀리긴 했어도 어미에게 마저 다정한 표현을 이리 아낄 줄은 몰랐다.

어머니.

어머니는 그 곳에 화가의 꿈을 안고 가셨나요? 아니면 소설가가 되려고 가셨나요? 그리 노상 편지만 쓰시면 그림은 언제 그리십니까?

참 연합고사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는데 그 역시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말씀 드리며 자세한 내용은 선생님 편지에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보름 정도 남았는데 그 동안 열심히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지진이 있다던데 조심하시고 이만 맺겠습니다.

간추린 뉴스, ①아줌마가 싸준 도시락 반찬 우수 ②손발 깨끗이 씻음 ③건강해서 비타민제는 음식물로 대체.

1986. 11. 20. 막둥 동제 올림.

쌀쌀맞고 정감 없는 세 남자의 편지가 무릎위로 멋대로 흩어져 내렸다. “비정한 사람들…. 이 녀석들 영락없이 부친을 닮은 거야.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 흩어진 세 통의 편지를 다시 끌어다가 샅샅이 뒤져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 구절에서라도 애틋한 구절을 찾아내야 견딜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난 아이들과 당신을 그리워할 거야…. 계속 보고 싶어할 거야…. 그리고 돌아갈 거야….” 이날 얼마 동안을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울었다.

한 달 뒤 동제 담임에게서 편지가 왔다. 동제가 고입 연합고사에 거뜬히 최고 점수는 받았지만 그 동안 엄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찔끔거리니 안쓰럽기 한량없었다고 썼다.

이 해 타이페이 12월은 꽤 쌀쌀했고 자주 비가 내렸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가 얼마남지 않은 날, 두툼한 소산의 편지가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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