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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자의 예술기행 29] 화려한 유학시절..“이걸 그리라구요?”
2017년 01월 26일 (목) 08:17:39 박용근 기자 osong0670@hanmail.net

5월로 접어들면서부터 타이페이 생활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초대이후 임옥산 교수 연구소 입문이 수월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9월 입학까지 임 석좌교수의 수제자며 당시 사범대 미술계 학장인 황창호웨이 전통 채색화 전공 교수에게 개인 레슨의 기회까지 주어졌다. 자국의 제자들도 누릴 수 없는 행운을 얻었으니 내 날개는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黃昌惠황창혜 교수의 세필화 뎃생수업

 

자기 스승의 안배를 공손히 받아들이는 제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국내 학생들도 황 교수의 개인 교습이 쉽지 않은 처지에 내게 주어진 혜택은 참으로 특별했다. 임옥산 교수님의 환영 초대가 있던 날 특별히 눈에 띈 교수였는데 예감과 들어맞은 게 신기했다.

우선 다른 교수들과 다르게 깔끔해 보였고 말이 없어 조금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어도 연신 떠들어대며 웃음이 헤픈 몇몇 교수들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50은 넘어 보였지만 훤칠한 키에 머리가 고불고불하고 헐렁한 청바지가 잘 어울려 보였다.

이때부터 일과표가 틈 없이 빡빡해져 공 선생은 집 생각할 겨를 없어 다행이라 했지만 머릿속은 하루에 몇 번씩 마냥 한국으로 달리곤 했다. 의욕도 순간이었다. 동연이나 동제, 소산 생각에 하루면 몇 번씩 줄줄 울었다.

   
 

林玉山임옥산 교수의 뎃생수업

 

“이 나이에 무엇을 더 배우겠다고 이리 외로워야 하지? 돌아가고파! 아이들이 보고 싶어!” 공부를 하다가도 창밖을 보면 눈물이 났다. 언어학당 통쉬에(學友) 추자는 이렇게 틈틈이 울어대는 나를 달래느라 수시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황 교수 수업과 임 석좌교수 연구소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씩 오후와 밤 시간으로 짜였고 금요일과 토요일 밤은 서예계 거장 사종안(謝宗安) 선생 문하에 정식으로 입문했다. 강암 송성용 제자와 대만 사종안 선생 제자와의 이문(二門) 교류전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종안 문하에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몇 년 동안의 교류에서 유난히 사랑과 관심이 깊었던 사종안 선생의 배려는 타국에서의 내겐 부모 같은 든든함이기도 했거니와 타이페이 도착하여 며칠 후 수십명의 제자들을 모아 환영파티를 열어주며 사종안 선생은 나를 한국의 제자로 선포했고 사적으로는 양딸이 되기를 원했다.

수업은 거의 밤 11시가 넘어서야 끝났는데 스승은 80이 가까운 노구에도 마다 않고 기어이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섰다. 또 버스에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기사에게 내릴 곳을 연신 당부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당시 대만은 늦은 밤 치한들의 위험이 커서 여자 혼자 택시 타는 것은 금기시돼 있었다. 이렇게 일주일이 전혀 휴식이 없이 돌아갔다.

매일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으레 자정이 지나다 보니 정작 파김치가 된 나보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왕 선생 가족이 문제였다.

   
 

태양의 풍속도 1994년 작

 

왕 선생은 매일 시간 맞춰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왔고 그의 아내(양 교장)는 간식을 챙겨 놓고 기다렸다.

겨우 일요일 하루 휴일이지만, 그 마저 월요일과 화요일의 과제물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오후는 추자랑 어울려 실컷 놀았다. 외출 시에는 반드시 양 교장의 승낙을 받아야 했는데, 내가 안쓰러웠는지 공부는 살살 하라면서 부추겨주기도 했다.

   
 

대만 사범대학 미술계 채색화 수업시간 1989년 8월

 

추자와 내가 즐겨 찾는 곳은 타이페이의 번화가 시먼찅(西門丁)이었다. 늘 거리는 인파로 북적댔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 거리엔 노점상이 화려하게 전을 벌였다.

빈 공간만 있으면 상점이 됐고 갖가지 물건들이 넘쳐났다. 타이페이에선 어떤 규제도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자유중국 자체라고 해야 옳았다.

대만은 더운 기후인데다 여름에는 태풍이 잦아 도로 구조는 합리적으로 설계돼 있는 편이었다. 도로 옆은 나무를 심어 태양의 열기를 가렸고 인도는 대부분 지붕이 있어 햇볕과 잦은 비를 피할 수 있게 했다.

노점상들이 점령하고 있는 인도라 해도 누구하나 눈살 찌푸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 부딪치기라도 하면 그저 미소로 서로의 무한함을 살펴주는 게 이들이었다.

‘뚜에 부치(미안해요)’ ‘매이 콴시(괜찮아요)’가 몸에 배있는 이들의 여유로움이 정말 신기했다. 아는 처지에 부딪쳐도 도끼 눈 뜨는 까칠한 나로선 이해가 안됐다.

예로부터 대인(大人)을 자처하던 중국인들의 폭넓은 자존심이 사뭇 부럽기도 했다. 추자와 나는 마음껏 한국말로 떠들어대며 밤늦도록 시먼찅 거리를 누비곤 했다. 기름진 음식에 줄줄 설사를 해대다가도 시먼띵 화교 식당의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 말아 먹으면 며칠이 또 거뜬했다.

   
 

대만 미술계 캠퍼스 1986년

 

무엇보다 쇼핑의 재미는 쏠쏠했다.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옥가락지며 옥팔찌 등의 사재기 재미는 잠시 집 생각을 덜어주기도 했다.

어쨌거나 시먼띵 거리는 일주일의 긴장을 풀어주는 훌륭한 휴식처였다. 그래서인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울컥 그 거리가 그립고 길가 음식들이 먹고 싶어진다.

분수 못 차리고 일요일을 노는 것으로 낭비한 월요일은 언어학당 수업부터 밀리기 일수였다. 다른 학생들의 과외도 뒤로 하고 개인 학습을 맡아 준 황창혜 교수의 수업은 비중이 컸다.

외국인이고 한국의 화법과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황 교수도 신경을 크게 쓰는 것 같았다. 사제간의 관계도 우리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 그의 깊은 관심에 놀라고 긴장됐다.

한번 스승이 되면 혼신을 쏟아 그 제자를 거두는 것이 이들의 정신이라는 것을 당시는 그리 실감하지 못했다.

당시 대만의 예술대학 교수들 사이에는 한국과 달리 공공연하게 과외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여유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명한 교수에게 사사할 수 있는 체제였다.

예술계 교수들은 학교 월급보다 높은 과외 수업으로 원활한 예술활동과 사생활을 하고 있었고 누구보다 황창혜 교수의 입지는 대단하여 교수의 생활로는 호화스러웠다.

당시 대만 화계에서 이미 각광을 받기 시작한 세필 채색화와 화조화의 기반을 명문인 사범대학 그의 스승 임옥산 교수의 맥을 이어가는 황 교수 자리는 학생들에게 당연히 우상적 존재가 되어 있었다.

석사과정을 밟는 학생들도 황 교수의 강의는 필수였을 정도. 현실적으로 돈이 되는 몇 팀의 과외도 접고 나를 택했다고 귀띔해 준 공 선생의 설명은 흐뭇했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고가인 과외비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황창호웨이 교수 집은 바로 사대 앞에 있었고 위아래 복식층이어서 꽤 넓고 마치 작은 갤러리 같았다. 위층은 작업실인데 사방에 그의 그림이 걸려있어 더욱 이채로웠다.

정교한 세필로 그려진 황 교수의 채색화와 화조도는 경이로웠다. 특히 채색 모란도는 꽃잎이 흔들리며 그 안에서 은은한 향이 코끝에 닿는 듯했다.

황 교수는 내게 긴장감을 주지 않으려고 많은 배려를 해줬다. 당시 사대 미술과에 한국 학생이 몇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자 황용순이라는 4학년 학생을 통역으로 오게 했다. 그 애는 내 덕에 스승의 강의를 듣게 됐다면서 좋아했지만 내게 그리 도움은 못되었다.

거창하게 기대했던 황 교수의 첫 수업은 황당했고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말이 통할 리 없으니 서로 눈을 부딪치면 미소짓고 간단한 필답이 소통의 전부였다.

다정한 눈인사를 거듭하던 그는 서랍 안에서 파란색 칫솔을 꺼냈다. 그리고는 내 앞에 위치 잡아 대각선으로 놓더니 촘촘히 박힌 칫솔의 숱을 낱낱이 그리라는 거였다.

“네에? 이걸 그리라구요?”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 나간 말은 앙칼진 한국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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